제2공화국 6부제2공화국 6부

Posted at 2016. 12. 15. 14:05 | Posted in MS/MS-DOS

그렇다면 장면이 피신했기 때문에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게 아닐까. 오히려 장면은 당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인물 중 유일하게 쿠데타를 진압하려 했던 인물로 보인다. 쿠데타가 성공한 이유는,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보다는 반공의 첨병 노릇을 잘할 것 같은 세력이 집권하기를 바란 미국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설명이다.


그러니 쿠데타가 성공해 제2공화국이 붕괴된 책임이 장면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쿠데타 세력은 집권 후인 1962년 8월 장면을 군사정부를 전복하려 한 이주당 사건의 주범으로 몰아 ‘혁명과업수행 방해 및 반국가 단체 구성’이라는 죄명으로 육국본부 보통군법재판에 기소해 무기징역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후일 형 집형이 면제되었으나 이처럼 쿠데타 세력이 장면을 반혁명사건 주범으로 몰아 구금한 것에서도, 그가 유약한 정치가가 아니라 군사정권이 가장 부담을 느낀 존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2공화국의 치세와 장면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장면이 이끈 제2공화국이 우리에게 맛보여준 자유민주주의와 자율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의 경험은, 어둡고 긴 군사독재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동안 우리나라에 민주화 운동이 맥을 잇게 한 희망의 기억이었다. 장면 정권은 4·19혁명 이후 방종에 가까운 시민의 자유 구가로 사회적 혼란이 빚어지는 상황에서도 물리적인 질서유지보다 시민에게 자율적 각성의 시간을 주려고 했다. 

물리적 질서유지보다 자율적 각성 중시 

연일 계속되는 데모로 사회가 혼란에 빠졌지만, 민주당이 집권한 후 집권 전의 공약을 위배할 수 없었다. 내각책임제를 실시하면서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독재적인 수법으로 정권을 유지한다면, 이는 국민을 배신하는 것밖에 다른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혼란기라 해서 국민을 배신할 수 없었다. 정권을 잡은 우리로서 무슨 핑계로든지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총검에 의한 외형적 질서’보다도 ‘자유 바탕 위의 질서’가 진정한 민주적 질서라고 믿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자유당 정권하에 억눌렸던 국민이 자유가 허락된 이때에 쌓이고 쌓였던 울분을 한번은 마음껏 발산하고 나서야 가라앉을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뻔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은인자중한 것이다.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 번 주어보자’는 것이 민주당 정부의 이념이었다. 갈수록 혼란을 더해가는 사회상황 속에서 우리는 철권(鐵拳)으로 억압하는 대신 시간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귀와 입으로 배운 자유를 몸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단단한 초석이 되는 것이다.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의 자각에 기반을 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구현이라는 장면의 선각적 정치사상은 5·16 군사정변으로 좌절됐지만,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과정에서 항상 꺼지지 않고 빛을 발하며 좌표가 되어준 등대였다. 한마디로 장면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적 정치인이었다. 그가 남긴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총리나 각료들의 헌신적인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뼈에 새겼다. 아무래도 전 국민이 합심해서 이끌어야 하는 하나의 수레와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협력할 때 수레바퀴는 잘 구른다”는 경구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여전히 유효한 처방이라고 본다. 

장면의 삶은 우리 시민의식의 정화를 촉구하는 지표가 아닌가 한다. 비록 실패했지만 자신에게 충실했던 그의 삶과 이상은 오늘날 우리 자신을 비춰볼 거울이자 영원히 우리 기억 속에 간직해야 할 귀중한 유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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