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공화국 4부제2공화국 4부

Posted at 2016. 12. 15. 14:01 | Posted in MS/MS-DOS

미국의 한반도 개입의 제1차적 목적은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 구축이었으며 민주화는 다음 우선순위로 밀리는 부차적 목적이었다. …미국은 장면 정부를 계속 유지할 때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정통성이 있는 장면 정부를 버리고 정통성 없는 군부쿠데타를 확실히 지지했으며 미국의 ‘반공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사들은 민주주의적 민간정부를 버리고 불법적 군부를 지지한 미국의 행태를 의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통념과 달리 1957년 이후 미국이 생각한 이승만 이후 집권자는 부통령 장면이 아니라 자유당 온건파를 대변하는 이기붕과 민주당 구파 조병옥의 연합이었음이 최근 미국측 기밀문서로 밝혀졌다. 또한 장면 정부가 추진한 ‘10만 감군’과 남북화해 정책 등은 한반도를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미국의 세계전략이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 결과 제2공화국 시대에 시도된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정착과 대외적 자주의 꿈은 내부적으로는 보수 ·반동세력인 군부의 5·16군사정변과 민주당 구파의 야합에 의해,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의 쿠데타세력 지지로 붕괴되고 말았다. 

1960년 3월18일자 ‘동아일보’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전개한 ‘선거 무효선언’과 침묵시위에 대해 “국회 민주당 소속의원 50여 명은 18일 상오 국회에서 3·15 정·부통령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총퇴장해 10시18분부터 10시28분까지 약 10분간 의사당 앞에서 서린동에 있는 민주당 의원부 연락처에 이르는 400m 거리를 도보로 행진하면서 무언의 데모를 행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4월6일자 ‘동아일보’는 민주당 민권수호 공명선거 추진위가 주동이 돼 전개한 당일의 데모에 대해 “3·15 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외치며 마산사건 원흉의 처단 및 재선거를 호소하는 데모가 6일 상오 서울에서 감행됐다. 민주당 민권수호 공명선거 추진위 등이 주동을 이룬 이날 데모는 경찰당국이 적극적인 방해를 회피했던 까닭에 연도에 늘어선 수십만 서울 시민의 소극적인 지지를 얻어 계획한 코스를 따라 큰 사고의 발생 없이 강행진이 단행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러한 민주당의 부정선거에 대한 조직적인 항의 데모는 4·19혁명 발발의 중요한 도화선이 된 것으로 보인다. 

4·19에 무임승차하지 않아 

이어 4월11일자 ‘동아일보’ 호외는 3·15시위 당시 행방불명된 김주열군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11일 밤 6시부터 마산시에는 미증유의 중대사태가 발생, 11시 현재 확대일로에 있다”는 급보를 전했다. 분노한 민심은 4월18일 고려대생 시위 이후 4·19혁명으로 폭발했다. 장면은 항변한다. 마산 궐기에서 4·19혁명에 이르는 과정에서 민주당은 무임승차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역사적으로 그 전례가 없는 주권 박탈의 부정선거가 실시된 그날 저녁,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의 데모가 발생해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태까지 빚어냈다. 이는 자연적인 폭발이요, 민심이라는 급류가 굽이친 한 표현이다. 그러나 민주당이라는 야당 세력이 줄기차게 부정과 독재에 싸웠기 때문에 민심이 이에 호응해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19 학생혁명도 민주당의 대여(對與) 투쟁이 길을 닦아놓은 기반 위에 이룩된 위대한 의거였던 것이다. …국민은 민주당의 이러한 투쟁사를 옳게 인식해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민주당이 정권욕에만 급급했고 4·19 혁명을 맞아 노고 없이 정권을 쥐게 됐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본다. 4·19 학생의거가 직접적으로 독재를 무너뜨린 것은 사실이다.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피를 뿌리며 헌신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4·19 학생혁명이었다. 그러나 학생들로 하여금 부정과 싸우는 의거의 바탕을 마련해준, 여러 해에 걸친 민주당의 공로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장면은 부통령 재임 시절 부통령이기 이전에 야당 지도자로서 독재와의 투쟁을 선두에서 지휘했으며, 이러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그가 전개한 투쟁의 성과가 4·19혁명에 이르는 민주주의 회복의 도정에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제2공화국은 4·19혁명에 ‘무임승차’해 탄생한 게 아니었다.

‘초대받은 손님’ 

그가 이끈 민주당 정권, 정확히 말하면 신파정권은 3·15 부정선거로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막아버린 자유당 정권의 불의에 항거해 4·19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최전선에서 독재의 부당함에 온몸으로 항거함으로써 민주주의 실현의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민주당 정권은 4·19혁명의 이상을 실현할 책무를 자임할 의무와 권리가 있었다고 본다. 

제2공화국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 중 공통적인 것이 장면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다. 장면에 대한 부정적 인식 형성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한승주의 연구(‘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에 따르면, 그는 어떠한 정치활동의 경험도 없이 “가톨릭적 배경과 영어실력” 덕택에 피동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그리고 “강한 결단력과 즉각적 행동이 필요한 상황에서 상당히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취한 “형식적 지도자”로서 민중의 힘에 의해 일어난 4·19혁명에 편승해 내각 수반에 오른 “항상 수동적이고 자기 패배적인 행동 경로”를 취한 무능한 지도자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부정적 평자의 지적대로 장면은 “정계의 영원한 초대받은 손님”에 지나지 않는 나약한 지도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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