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공화국 5부제2공화국 5부

Posted at 2016. 12. 15. 14:03 | Posted in MS/MS-DOS

단독 정부 수립을 선포한 대한민국이 고립을 면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승인이 필요했다. 또한 장면이 주미대사로 재직 중 발발한 6·25전쟁도 남북한군의 전력상 격차가 심했기에 국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즉,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과 6·25전쟁시의 유엔군 파병은 국가의 존립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문제였고, 이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데 장면 개인의 역량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는 정치가로서뿐 아니라 외교관으로서도 초심자였지만,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훌륭히 해결함으로써 차후 한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다. 이러한 성가를 배경으로 그는 이승만 정부에서 제2대 국무총리와 민주당 최고위원이 됐으며, 1952년 미국이 세운 이승만 제거 계획인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에 잘 드러나 있듯 미국조차 이승만을 대체할 한국의 차기 지도자로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장면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을 근거로 한 연구들이 장면이 정치가로서 성장한 요인을 ‘그를 필요로 하는 정치세력에게 충분한 이용가치가 있는 경력의 소유자이면서도 그들이 마음대로 이용하기 쉬운 꼭두각시형의 형식적 지도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장면은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이나 6·25전쟁 당시 유엔군 파병 등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상황 타개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음으로써, 그리고 반독재 투쟁을 통해 성망(聲望)을 높임으로써 성장한 인물로, 경쟁 상대들에 비해 출중한 자질을 갖춘 대표적 정치가로서 합헌적 절차를 거쳐 집권한 정치가였기 때문이다.

“장면은 나약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또한 지도자로서 그의 자질 부족을 문제 삼는 주된 논거는 5·16 당시 장면 박사가 수녀원에 은신해 두문불출했기 때문에 쿠데타를 진압할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주장이다. 1961년 5월16일 새벽 4시 쿠데타군은 장면 총리의 임시숙소인 반도호텔로 들이닥쳤는데, 불과 10분 전에 장면은 숙소를 나선 터였다. 당시 장면이 쿠데타에 대응조치를 취할 수 있던 최상의 은신처는 미국대사관이었다. 

그러나 장면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길 건너 미 대사관으로 가보려 했으나 문이 절벽으로 잠겨 있었다. 무교동 골목으로 빠져 청진동으로 달려가, 한국일보사 맞은편 미대사관 사택의 문을 두드렸다. 어떤 엄명이 내렸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겁에 질려 수녀원에 숨는 바람에 쿠데타 진압 기회를 놓쳤다며 그를 무능한 인물이라고 혹평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다르다.

“잠시 피신해 정세를 보기 위해서 혜화동의 수도원으로 갔다. …겁에 질려 숨어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장면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실 장면 총리는 자신의 독실한 신앙 때문에 유혈사태가 초래될 가능성이 큰 쿠데타 진압을 기도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보인다. 물론 개인의 신앙을 지키느라 많은 국민을 군사독재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요즘 새로 공개된 미국측 기밀문서를 보면 장면은 국가수반의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장 총리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다만 세월이 진실을 말해줄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시간이 지나고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장면 정권으로는 북쪽과 대치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민주당을 끌어내리려는 일련의 계획을 추진했다. 5·16혁명이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미국의 이런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이 말은 당시 쿠데타의 주역이던 김종필이 최근 한 말이다. 게다가 장면 총리가 미국측과 연락을 유지하면서 계속 쿠데타 진압을 요청했다는 것도 미국측 기밀문서에 기록돼 있다. 당시 미국은 쿠데타를 진압할 생각이 없었고, 윤보선 대통령과 장도영 참모총장도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김녕의 견해가 주목을 끈다.

최근 공개된 이러한 미국 정부 문서에 따르면, 장면은 매일 2~3번씩 미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안전상의 이유로 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주한미군사령관(유엔군사령관)이 책임지고 사태를 처리해달라고 요청했으며, 매그루더가 본국에 계속 전문을 보내 미국의 대처 방안을 문의한 결과, 어떤 경우에라도 장면을 대신해 유엔군사령관이 사태 수습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됐다. 즉, 장면 스스로가 나타나지 않기에 미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불개입의 이유를 장면에게 전가한 것이었다. 장면으로서는 자신을 찾으러 쿠데타 부대들이 혈안이 돼 있는 상황에서 앞에 나와서 쿠데타 진압을 공개적으로 명령하거나 요청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5월17일 아침에 장면은 다시 한 번 미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미국의 불개입정책이 확정됐음을 확인하게 됐고 미국의 지지 없이 상황을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가르멜 수녀원에서 나와 곧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면 정부에 대해 우려와 실망을 느끼던 미국 정부는 그 후 쿠테타를 용인했다. 이렇게 보면, 장면이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한 것은 미국 정부가 장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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