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업적 1부이승만의 업적 1부

Posted at 2016. 12. 15. 14:24 | Posted in HTML/HTML5

저희집에 놀러와 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책장 한가득 박정희 천지입니다. 제가 모르는 박정희 관련 책이나 논문은 거의 무의미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할정도로..?

그에 비하면 이승만에 관한 자료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박정희-조선-식민지(위안부 등등)-이승만 순으로 관심이 가다보니 상대적으로 소외된 느낌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승만에 관한 글을 하나 쓴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싶다가 그냥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이승만 정권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몰락했는지는 다음 글에서 논해보고자 하고 업적을 우선적으로 써보겠습니다.

 

1. 이승만의 수많은 실정, 그러나…

이승만은 박정희와 함께 그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정치적 견해가 갈릴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입니다. 일단 이승만은 12년에 걸친 장기집권 과정에서 수많은 실정을 범했습니다.

건국 초에 친일파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더라도, 민족적 자존감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잘못된 전황 보도로 서울 시민들을 고초에 빠뜨렸고 그러고 나서도 예고도 없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킴으로써 무고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던 점, 거창양민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은, 이승만 옹호자이신 유영익 선생조차 ‘천인공노할’ 사건이라 표현할 만큼의 실정을 저지른 것은 사실입니다.

단순한 실정을 넘어서 52년의 부산정치파동, 54년 있었던 사사오입과 같은 억지논리로 개헌, 마지막으로 60년 대규모 부정선거의 자행은 민주주의에 크나큰 해를 끼쳤습니다. 또한 진보당 탄압과 조봉암의 법살法殺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의 입장에 서더라도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자아냅니다.

2. 경제계의 반대에도 이익균점권을 성립

이러한 명백한 실정이 있으면서 동시에 이승만은 그의 반대되는 평가를 받을만큼의 놀라운 업적 또한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이승만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중요한 인물로 간주하는 것은 그가 꾸준히 “미국화”를 추진했던 인물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간단하게 나눠서 각 분야에서의 업적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우선 정치 분야에서 우익들은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했다는 업적이 있다고들 합니다만 저는 거기에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헌법기초자인 유진오는 건국헌법에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대거 포함했다고 평가했고, 박명림 교수님은 미국이 이승만 정권에다 헌법상 사회주의적 요소를 제거하지 않으면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했을 정도로 사회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또한 이흥재 교수님은 기업 이윤을 노동자들에게도 분배하라고 못 박아 둔 건국헌법 18조, 즉 소위 말하는 ‘이익균점권’ 조항이 경제계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립됐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아직은 확실하게 주장하기 어렵지만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이승만이 당시 “정치”를 경험한 미국은 시기적으로 뉴딜기였습니다. 루즈벨트의 민주당이 장기집권하면서 뉴딜 정책을 펼치던 시기였는데, 이 시기를 통해 정치를 배운 이승만의 정치 사상에 직간접적으로 뉴딜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이승만은 해방 이후에도 공산당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국내의 사회당 창당에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에는 좌익 정당이 존재해야 한다고 축하 서한을 보냈던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박헌영과의 사이가 틀어져서 공산당을 싫어하게 됐다는 생각이 매우 강하게 듭니다.

당시 임시정부를 비롯해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건국 이후의 건설방침이 민주사회주의로 수렴하고 있었다는 것이 독립운동사 연구 분야의 통설이라는 점을 고려해봐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승만은 확실히 동시대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사회주의를 이념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했습니다.

 

3. 선거를 정착시킨 대통령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했다는 주장에서 한 가지 새겨들어야 할 주장이 있습니다. 바로 “대통령제”의 도입입니다. 이승만은 48년 헌법기초위원회에서 마련한 내각제 헌법 초안을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도록 압력을 넣어 자기 주장을 관철시켰고 52년 1차 개헌으로 직선제를, 54년 2차 개헌으로 국무총리제를 폐지함으로써 한국을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식 대통령제”를 도입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을 많은 진보적 사학자들은 ‘독재화’로 보지만 시각을 바꿔서 이승만이 원하던 것이 한국의 “미국화”라는 것을 이해하고 본다면 미국식 대통령제의 도입과정으로 이해가 됩니다. 이러한 강력한 대통령제야말로 한편으로 그 뒤에 있을 발전의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앞서 말했듯이 이승만은 자유당을 앞세워 권위주의적인 정치를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럼에도 이승만은 민주주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우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기란 정치학계에서도 이견이 많으나 적어도 자유민주주의라 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인 선거와 선거를 통한 정권 창출의 가능성, 그리고 비판적 언론의 존재”는 충족을 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특히나 정기적으로 민주적 선거를 치르는 ‘관행’을 정착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한국전쟁 중에도 전국에서 선거를 치뤘으며 최초의 지방자치제 도입을 이뤄냈으며, 설령 자유당이 선거에서 불리할지라도, 물론 부정선거를 하기는 했습니다만, 선거를 통해 권력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지방자치제도 없애버리고 인구비례당 국회의원 수를 반으로 줄여버린 박정희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비하면 훨씬더 “민주적”인 독재였습니다. 게다가 조용중 선생님은 이승만이 국회해산을 여러 번이나 고려했음에도 “초대대통령인 나로서는 국회를 해산했다는 전례를 만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해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즉 의회 제도를 유지함으로써 민주주의라는 “익숙하지 않은” 제도에 국민들이 익숙해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57년 언론규제조항을 국회에서 통과시켰음에도 비판적 언론은 더 활성화됐으며 59년 경향신문을 폐간할 때까지는 노골적인 언론 탄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레고리 핸더슨도 이승만기에 언론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 비판적인 언론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성장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재와 이것이 어떻게 상응하는가? 이승만이 참가한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한인총대표회에서 참가자들이 택하고 1920년 서재필이 이승만에게 건의한 민주주의관이 “교도민주주의敎導民主主義”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민주주의를 향유하기 전에 준비단계로 일종의 철인정치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승만은 나름대로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독재를 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했다고 할 수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4. 높은 교육열과 문맹 퇴치에도 노력한 대통령

이러한 저의 주장이 이승만을 “옹호”하는 것으로 비춰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과 권위주의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가 민주주의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내세웠기에 비판적 언론을 폭넓게 허용했으며,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 주기적으로 선거를 치뤄 민주주의적 관행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게다가 교육적인 면에서 이승만은 연평균 총예산의 10% 이상의 예산을 교육 부문에 투입하여 1945년 문맹율 78%로 식민지기 고작 22%만이 취학 경험을 갖고 있던 한국을 1959년 전국 학력 아동의 95.3%가 취학하는 국가로 변모시켜놓았습니다.

문맹퇴치에도 노력해 45년 78%였던 문맹율은 59년 22%로 경이적인 수준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게다가 이때 미국으로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유학을 떠났고 이것이 나중에 경제개발의 자원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이와 같이 교육을 통한 국민의식의 성장은 이승만 스스로를 “몰락”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대학생이 엄청나게 증가해 60년에는 무려 10만 명이나 됩니다. 이런 교육과 지식인 계층의 성장은 민주주의의 확산에 기여합니다.

가령 4.19 혁명 이후 <광장>이라는 소설을 쓴 최인훈은 그 서문에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게는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을 들여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습니다. ‘서구적 자유의 풍문’을 국민들에게 보급한 것은 비판적 언론뿐만 아니라 “교육”의 역할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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