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쿠데타는 권력이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되며 정권 탈취 후에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계엄령 선포, 주요정부기관의 탈취⋅점령, 언론통제, 반대파의 체포⋅숙청, 정부요인의 불법납치⋅감금⋅암살, 의회의 정지, 헌법개폐 등의 조치를 취한다.2)
10⋅26직후의 권력공백을 틈타 12⋅12쿠데타를 강행한 강경 신군부세력은 위의 조치들을 하나하나 진행시키면서 각 정당, 재야단체, 학생운동 세력등 이 추진하고자 했던 개헌논의를 무시하고, 민주화에 대한 희망에 고무된 사회분위기를 무력으로 탄압하며 권위주의적 지배체제를 확보하기 위한 일련의 정치과정을 밟아나갔다.
급기야는 5⋅17 쿠데타를 계기로 정치권력까지 완벽히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여타 정치세력을은 완벽하게 거세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를 설치하였고, 이는 신군부의 정권창출을 위한 전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국보위는 그 모델이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였으며3) 이른바 ‘정치쇄신’, ‘공무원 숙정’, ‘사회정화’등의 명분아래 정치⋅사회적 반대세력 및 기존의 정치적 기득권 세력 숙정을 추진한 혁명위원회 성격의 ‘준군정기관’4)이었으며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예비정부’였다.
국보위의 의장은 최규하였지만, 그는 ‘얼굴마담’에 불과했을 뿐 실질적인 권한은 상임위원장인 전두환의 몫이었고 이로써 전두환은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이어 국보위 상임위원장까지 차지함으로써 명실공히 전두환은 정치일선 전면에 나서게 된다.
따라서 본 발제에서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의 정권창출과정을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국보위체제’의 등장배경, 활동, 그리고 제5공화국의 출범 과정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10⋅26 이후의 정치상황과 12⋅12, 5⋅17쿠데타
1. 10⋅26 직후의 정치상황
1979년 10⋅26사건은 정치적으로는 권력의 구심점이 사라지고, 사회적으로는 억압의 정점이 사라진 상태로 볼수 있다. 10⋅26 직후 정부는 10월 27일 새벽 2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헌법 제 48조5)에 의거 국무총리 최규하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의결함과 동시에 아울러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였다.6)
미국은 10월 27일 카터 대통령이 긴급히 소집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의 결정에 따라 주한미군의 ‘3호방위태세(DEFCONⅢ)를 발령케 하고, 국무성으로 하여금 한국정세에 개입할 우려가 있는 외부세력(주로 북한과 소⋅중)에 대하여 미국 정부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입각한 의무에 따라 강력히 대처하겠다는 경고성 성명을 발표케 하였고 28일에는 AWACS(공중경보통제체제) 2대를 한국으로 급파하였으며, 30일에는 미 제7함대의 기함 브르리지 호(12,000톤급)가 부산에 입항하였고 11월 2일에는 동함대 소속 항공모함 키티호크 호(73,000톤급)와 유도미사일 순양함 2척이, 부산에 크리키트함 등 3척의 전투함도 진해와인천에 기항하는 등7) 만약에 있을 한국의 돌발상황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기울였다.
또한 계엄당국은 10월 30일 ‘계엄업무의 기조’를 발표하여 완벽한 치안유지와 국민의 뜻이 결집되는 정치발전을 뒷받침하는데 역점을 두겠다고 선언하였고 이를 위해 계엄규제를 신속하게 평시 상태로 환원하여 불안한 시민, 산업사회의 긴장을 완화시킬 것이며, 행정부의 정상적인 기능수행을 뒷받침 하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정국의 안정에 대하여 한미 연합사령관 위컴과 각종 외신들은 한국사회의 안정회복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8)
당시 정국동향을 살펴보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11월 8일 특별담화를 발표9)하여 기존의 헌법절차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 후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빠른 시일 내에 헌법개정을 실시할 것을 천명하였고, 공화당은 11월 13일 전당대회에서 김종필 고문을 총재로 선출하여 당의 활성화를 꾀하였다.10)
10⋅26이후 신민당 총재로 복귀한 김영삼11)은 최규하 권한대행의 특별담화에 대해 최규하 권한대행과의 회담이후 ‘국회의 개헌주체화’의 주장을 버리고, ‘대통령 보궐선거 방침’을 양해함12)으로써 단계적인 민주화 전략을 채택하였다.13)
그러나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의 ‘국민연합’세력들은 대통령 보궐선거 반대, 공화당과 유정회, 통일주체국민회의의 해체, 거국민주내각의 구성을 요구하여 1979년 11월 13일의 ‘동아투위 등 5개 단체 성명서 사건’14)과 11월 24일 ‘YWCA 위장결혼식 사건’15) 을 일으키는 등 반정부 투쟁 전략에 있어서 신민당보다 강경투쟁 전략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화, 신민 양당은 모두 정상적인 정치 과정을 존속시키는데 중점을 두었고, 군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하였으며, 학생 및 재야 세력도 유신체제의 탄압속에서 쇠약해져 있기도 하였지만, 최고 통치자의 피살과 계엄령 선포의 급박한 정세 변화에 대처하는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저항의 수준에 한계가 있었다.16)
이러한 정국흐름이서 정부는 11월 19일부로 각 대학의 휴교령을 전면 해제하였고17) 12월 6일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대회에서 재적의원 2,560명중 11명이 불참한가운데 2,549명이 투표하여 2,465표(96.7%)의 압도적 찬성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최규하 는 17일 국무회의에서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결의하였다. 18)
긴급조치 9호의 해제로 인하여 12월 8일 김대중이 자택연금에서 해제되었고 , 10⋅26이후 신민당 총재로 복귀한 김영삼, 11월 13일 전당대회에서 공화당 총재로 선출된 김종필이렇게 ‘3김시대의 개막’이 도래하였다.
2. 12⋅12 쿠데타의 배경
계엄 선포 당일인 79년 10월 27일 오후 2시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함참의장과 3군 참모총장 입회하에 ‘군의 정치적 불관여’에 대한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도 기회있을 때마다 계엄의 목적과 ‘군의 정치적 중립’을 거듭 강조했었다. 그래서 군 수뇌부에서는 계엄의 성격과 목적, 그리고 군의 정치적 불개입 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19)
그러나 10⋅26 직후 정치권력의 공백상태에서 유신체제하에서 가장 큰 수혜를 받으며 성장해온 군부 내 ‘하나회’ 소장 장교 입장에서는 김재규를 비롯한 시해범들조차 여론의 압력에 의해 구제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20)와 함께 12월 13일로 예정된 최규하 신정부의 출범과 김재규의 최후진술 이전에 국면을 전환시켜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였다.21)
하나회 세력의 리더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0⋅26 사건의 수사를 전담하기 위해 설립된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겸임하게 된 이후, 중앙정보부의 국장급 이상 전원을 조사함으로써 중앙정보부를 무력화 시켜놓고 국가의 정보를 독점하게 되었다.22)
79년 11월 중순, 육군에서 주요 직위에 대한 인사이동을 실시한 바 있었는데,23) 그 인사에서 이른 바 소장파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는 포함되지 않았고 정치군인(대통령 경호실 및 중앙정보부 등에 근무한 자)들을 정리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그들로 하여금 군내 입지에 위기의식을 낳게 되었다. 24) 또,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재전 경호실 차장 구속여부와 김재규, 김계원의 재산몰수 등에 관련해서 이견을 보였고 11월에 들어서 수사가 일단락 되고 합수본부가 수사 이외의 부분까지 업무의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하자 브레이크를 거는 등 시종 대립양상을 보였다.25)
이러한 갈등속에서 합수부의 10⋅26 사건 수사과정에서 김재규가 정승화 계엄사령관과의 연계설을 주장하면서 횡설수설하였고,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10⋅26사건에 대한 자신의 초기 진술서를 여러 군데 고쳐 진술을 번복한 흔적을 남겨 의혹이 증폭되어 있는 와정에, 12월 9일 정승화는 뉴재현 국방장관에게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동해경비사령부로의 전보를 통한 교체를 건의하고 1980년 3월 실시 예정으로 하나회 정치 장교들의 분산 및 처리계획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신군부 하나회 세력은 생존을 위하여 모종의 조치를 취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분석할 수 있다.26)
이런 전두환과 정승화의 갈등속에서 전두환은 정승화에게서 중요한 틈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정승화가 10⋅26 사건시 시해현장 가까이에 있었고, 사건직후 김재규, 정승화 두 사람이 육본 벙커(지하지휘소)로 동행한 사실등으로 인하여 12월 12일 정승화 계엄사령관 전격 연행이라는 하극상을 가능케 했다.27)
이렇게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은 계엄사령관을 제압함으로써 일거에 군부를 장악함은 물론 비상 대권장악에 한발 더 용이하게 다가서게 되었다.
3. 12⋅12 쿠데타 직후의 정치 상황
12⋅12 쿠데타 이후 표류하던 군부세력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에게 집중 되었으나 정치권력까지 신군부세력에게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1980년에 들어서 남한사회는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낙관이 ‘서울의 봄’이라는 상황을 낳게 하였고 정치발전과 민주화에 대한 비판적인 분위기에서 나온 ‘안개정국’이 교차되는 상황에서 5월의 ‘서울역 대집회’를 기점으로 민주화 세력의 기세가 최고조에 달하였으나, 이는 신군부에게 군부의 정치 전면 등장의 명분을 주어 5⋅17 비상계엄확대조치가 단행되게 된다.
이시기 군부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3월 1일에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소장진급 2년 2개월만에), 3월13일에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에 대한 김재규 내란방조사건에 대해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28) 또 전두환은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되었는데 중앙정보부법이 보직을 가진 현역 군인이 중앙정보부장을 겸할 수 없게끔 규정했기 때문에 ‘서리’라는 편법으로 밀어붙였다.29)
전두환의 중정부장 겸직은 부총리급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고 정보장악 이외에도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할 수 있는 돈줄이기도 했다. 당시 중정 예산은 약 800억 원 정도 였는데, 전두환은 실제로 정권 장악 준비자금으로 이 가운데 120억원을 빼내 썼다.30)
이 시기 정치권은 1980년 2월 9일 공화, 신민 양당은 대통령 중심제, 대통령 직선, 임기4년, 1차 중임을 골격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확정하고 이를 국회개헌특위에 제출할 예정임을 발표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2월 29일 윤보선 전대통령, 김대중 및 지학순 주교를 포함한 긴급조치 위반자 등 687명에 대한 사면, 복권을 단행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3월 14일 중앙청회의실에서 열린 정부 헌법개정심의위원회개회식에서 국가권력이 과도하게 대통령에 집중된 정치제도와 과열된 대통령 선거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언론에서는 이원집정부제도 개헌론이 보도되어 정가에 파문을 던졌고 그런 와중에서 친여 신당설이 뚜렷한 근거도 없이 유포되었다. 4월 7일에는 신민당 입당여부로 관심을 모아오던 김대중이 신민당이 자신과 재야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며 신민당 입당포기를 선언했다.31) 유신체제하에서 정치활동이 금지된 김대중에 비해 신민당의 총재로 있던 김영삼은 당내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만들었고, 결국 양자간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한편 이제껏 억압 받아왔던 노동계는 ‘사북 노동항쟁’을 비롯하여1980년부터 5월 중순까지의 5개월동안 노동분쟁의 수가 유신체제 시기 전체 동안 발생건수를 합한 것에 근접하는 900건에 달하여 이른바 ‘노사분규의 폭발’상황을 빚어내고 있었다.32)
정치권의 분열과 노동계의 폭발상황에서 학생운동권은 4월 들어서면서 학원민주화를 거부하는 총⋅학장 퇴진을 요구하며 21개 대학에서 시위농성을 벌였고, 24개 대학에서 어용교수 퇴진, 12개 대학에서는 재단비리 척결, 11개 대학에서는 학교시설 확충 등을 요구하는 시위⋅농성을 하는 등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서 학내문제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학원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5월에 들어서면서 5월 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숙야회의끝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하는 정치군인세력의 정치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이유로 입영훈련거부운동을 철회하는 대신 ▲계엄령 즉시 해제 ▲ 유신잔당 퇴진 ▲전두환⋅신현확 퇴진 ▲정부주도의 개헌 중단 ▲노동삼권 보장 등 정치문제를 본격적으로 내걸고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서울대생 10,000명은 5월 2일부터 13일까지를 민주화 촉진기간으로 정하고 교내시위와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어 5월 13일부터는 연대생이 주축이된 6개대학 대학생 2,500명이 가두시위를 시작하였고 5월 14일 서울지역 27개대학 대학생 70,000여명, 5월 15일 오후 2시경 서울역앞 광장과 도로에서 서울시내 35개대학 대학생 100,000여명이 결집하는 힘을 보여주었다. 33)
그러나 서울역앞 학생시위는 지도부나 행동지침이 미약했고 무계획적이었으며, 비조직적인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신군부의 정치개입을 앞당기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즉, 학생과 재야세력은 효과적인 정치세력으로 동원되지 못하였을뿐 만 아니라 양김의 분열에 따라 내분을 겪음으로써 제한된 힘의 자원마저 소진시키고 있었다.34)
4. 5⋅17 쿠데타
5월 들어 격화된 대학가 시위사태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정부장 서리에 대한 퇴진과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정치쟁점화 양상으로 변모해 가면서 가열되기 시작하자 신군부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하였다. ‘시국수습방안’이란 전국비상계엄지역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는 것과 동시에 과도정부 성격의 소극적인 내각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비상기구의 설치, 그리고 계엄해제 요구를 결의할 가능성이 있는 국회의 해산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시국수습방안’으로 정리하였다. 이 방안은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이학봉, 허화평, 허삼수, 권정달, 정도영 등이 작성, 정리하였으며 1980년 5월 4일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궁정동 소재 중정안가에서 노태우 수경사련관 등, 신군부의 핵심이 모인 자리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동의를 얻었으며, 1980년 5월 17일 오전 11시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주요지휘관 43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북한군의 남침 우려를 이유로 군이 전면에 나서기 위한 ‘계엄확대’를 결의하고, 대통령에게 건의하기 위해 백지를 돌려 참석자로부터 연서명을 받았다.35)
그러나 이 5⋅17 계엄확대의 의결과정에 애초에 최규하 대통령의 의사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보안사령부는 16일 오전에 전군 보안부대장 수사과장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수사과장들에게는 18일 0시를 기해 계엄이 전국적으로 확대된다는 사실과 검거 대상자 명단이 통보되었다. 검거대상자들은 계엄확대를 알리는 방송이 나가기 전에 체포하라는 지시도 떨어졌다. 신군부는 12⋅12쿠데타 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에 대한 재가를 받기 전에 연행에 착수하였고 그 뒤 사후결재를 받은 것과 같은 과정이었다. 5⋅17은 12⋅12의 되풀이였다.36)
전국계엄은 그동안 지역계엄 대상지역에서 제외되어 있었던 제주도를 포함시키는 것에 불과했지만, 실제로는 지역계엄하에서 대통령-국방부장관-계엄사령관으로 되어 있던 통수계통이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바뀌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미 허수아비에 불과하긴 했지만, 민간정부의 내각 기능이 공식적으로도 정지되고 모든 걸 군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37) 또 군부의 정채개입을 위한 발판으로서 비상기구, 즉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준군정기관을 구성하기 위해서였으며, 계엄해제 결의안등이 상정될 예정이었던 제104회 임시국회38)를 무산시키기 위해서였고 기성 정치인과 재야정치인사 등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연행⋅구속 및 정치활동 규제를 가하여 신군부 집권을 본격화하기 위해서였다.
신군부는 이후 계엄포고령 제10호(계엄사령관 이희성)를 발표하여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계엄포고령 제10호39)의 내용은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시키고,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에 대한 사전 검열과 전국 대학의 휴교령을 내리는 것으로써 전국 92개 대학 및 국회의사당, 신민당사, 공화당사, 언론기관, 공공기관을 포함한 136개 주요 보안목표(방송국, 발전소 등)에 25,000여명의 계엄군을 증강배치했으며, 소요주동자들을 일제히 검거하였다. 또 권력형부조리 혐의자로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등을 구속하였고 소요의 배후혐의로 김대중 등 26명을 연행 조사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의 구속은 광주민중항쟁의 불씨가 되었고 광주민중항쟁은 신군부의 무력으로 철저히 진압되었다.40)
Ⅲ.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설치
광주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80년 5월 27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대통령령 제9897호)에 따라 전국비상계엄 하에서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으로 행정⋅사법업무를 조정 ⋅통제하는 기능을 갖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5월 31일 설치하였다.41)
국보위 설치는 원래 5⋅17 계엄확대조치 시나리오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국보위 계획에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권정달 등이 참여하였고 실무책임자는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당시 동방생명 감사로 있던 김영균(육사11기, 육군 법무감 출신)을 불러 권정달과 함께 일하도록 지시했다. 권처장은 “5⋅16때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은 비상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자 한다”면서 이기구의 법적 근거와 설치령을 함께 만들자고 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입장에서는 국보위의 설치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 지역계엄의 ‘대통령-국방장관-계엄사령관’의 지휘계통이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바뀌게 됨으로써 계엄사령관이 3권을 장악하고 내각까지도 직접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두환이 직접 통제하던 보안사와 정보부의 역할도 이희성 계엄사령관 밑으로 들어가 번거롭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의도에서 계엄사령부는 군투입에 의한 치안유지만 맡도록 하고 행정부를 지휘하여 새 정권 창출을 위한 정지작업과 사회개혁 업무를 총괄할 통제장치로서의 국보위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42)
국보위의 설치근거는 계엄법 제 9조(계엄실시에 관한 지휘 감독), 동법 제11조(계엄사령관의 관장사항)43), 동법 제12조(계엄지역내의 행정, 사법기관 지휘감독권)44), 정부조직법 제5조(부속기관 설치)45)에 두고 있다.46)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의 주요 조문은
제1조 (설치) 비상계엄하에서 계엄법 제9조 및 제11조의 규정에 의하여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함에 있어서 대통령을 보좌하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국책사항을 심의하게 하기 위하여 대통령 소속하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상대책위원회"라 한다)를 설치한다.
제4조 (상임위원회의 설치)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임에 따라 제1조에 규정된 사항의 기획과 집행의 조정 및 통제를 하게 하기 위하여 비상대책위원회에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이하 "상임위원회"라 한다)를 설치한다..
제6조 (분과위원회의 설치) ①상임위원회의 사무를 분장 처리하게 하기 위하여 상임위원회에 분과위원회를 둘 수 있다.
②상임위원회에 두는 분과위원회의 종류와 그 분장 사무는 상임위원회가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이를 정한다. 47)
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발족된 국보위는 새헌법의 성립과정을 주도하지만 그 자체가 위헌, 위법적 기관이다. 이 기구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설치령’이라는 대통령령(제9897호)에 의거 설치되었으나, 이는 당시의 정부조직법 제2조 1항48)에 위반하는 것이고, 대통령령에 관한 규정(당시 헌법 제52조)49)에 저촉되는 것이다.
당시 정부조직법 제2조에 따르면, “중앙행정기관의 설치 및 직무범위는 법률로 정하고, 그 보조기관의 설치 및 분장은 법률로 정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되어있는데, 국무총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과 외무부장관, 내무부장관, 법무부 장관, 국방부장관, 계엄사령관 등 각 부처 장관이 포함된 기구를 보조기관으로 보는 것에는 문제가 따른다.
또 대통령령으로 설치된 이 기구는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받은 사항과 법률을 집행하기 위해서 정책을 수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직자숙청, 언론인 해직, 언론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거꾸로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대통령령을 정의한 헌법 제52조에도 위헌성 문제가 따른다.
2. 국보위의 구성
국보위의 구성은 국무총리⋅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외무부장관⋅내무부장관⋅법무부장관⋅국방부장관⋅문교부장관⋅문화공보부장관⋅중앙정보부장⋅대통령비서실장⋅계엄사령관⋅함동참모회의의장⋅각군 참모총장 및 국군보안사령관과 대통령이 임명하난 10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50) 위원회의 운영은 의장인 대통령이 의제를 정하여 소집, 주재하도록 되어 있다. 51)또 국보위의 위임을 받은 사항을 심의 조정하기 위하여 상임위원회를 두었으며, 상임위원회는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중 대통령이 지명한 위원장과 30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상임위원회의 사무를 분장 처리하기 위하여 상임위원회 안에 13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각 분과위원회는 분야별 소관사항에 관한 기획⋅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52)
당연직 국보위원들을 제외하고 임명직 국보위원들과 상임위원회 상임위원의 성격을 분석하면 상임위원장을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맡고 차규헌, 노태우, 정효용 등 이른바 신군부 실세들이 국보위원과 상임위원을 겸임하면서 실질적으로 국보위를 주도하였다. 또한 국보위원 임명직 10명을 분석하면 백석주 한미연합사 부서령관, 진종채 제2군 사령관, 유학성 제3군사령관, 윤성민 제1군사령관, 차규헌 육사교장, 김정호 해군참모차장,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8명이 현역 군인으로 구성되었다.53)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대통령의 자문 보좌기관으로 발족하여 대통령 이하 내각의 총리, 주요 각료, 군 지도자 외 대통령이 임명한 군 지휘관 등 25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최 대통령에게 의장 직위가 주어졌지만 그 위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수반으로 하는 상임위원회라는 각내 내각(Inner Cabinet : 내각에서 실력 있는 각료들의 모임)이 설치되었다. 실제로 신군부는 국보위 전체회의를 단 두 차례밖에 열지 않았고, 정부부처와 장관의 고유 권한이거나 국무회의의 의결을 요하는 사항까지도 모두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결정하고 집행하였는데 상임위원장 이하 30인의 상임위원 가운데 18명이 12⋅12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었다. 그리고 이 상임위원회 아래 13개의 분과위원회와 사무국이 설치되었는데 각 분과위원장은 바로 내각 각부의 장관, 즉 각료에 해당했다.54)
3. 국보위의 활동
국보위가 발족되면서 내세운 기본목표는
첫째, 국내외 정세에 대처하여 국가안보태세를 강화하고
둘째, 국내외 경제난국의 타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합리적인 경제세책을 뒷받침하며
셋째, 사회안정의 확보로 정치발전을 위한 내실을 다지는 한편
넷째, 부정부패, 부조리 및 각종 사회악의 일소로 국가기강을 확립한다
라는데에 두고있다.
이러한 기본목표아래 국보위에서는 각 분과위원회별로 당면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첫째, 각계에 잠재하는 안보적인 불안요인과 국민적 단합을 깨뜨리는 계급의식의 선동이나 정부 전복 기도등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한편
둘째, 학원의 자율성은 보장하되 불법시위나 소요행위등 사회혼란을 통해 북괴를 이롭게 하는 행위는 근절시키며
셋째, 권력형 부조리 등 사회적 비리를 과감하게 척결하고 사회의 불신풍조를 없애 노력하는 사람만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기틀을 확립하고
넷째, 문란된 정치풍토를 쇄신하여 부정과 불의에 대하여는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한 도의정치를 확립하며
다섯째, 언론에 있어서는 국가이익이 우선하고 윤리나 도억이 존중되는 건전풍토를 조성하며
여섯째, 종교 및 신앙의 자유는 보장하되, 종교를 빙자한 정치활동은 통제되어야 하고
일곱째, 건전한 노사관의 확립과 기업인의 비윤리행위, 노동조합의 불법활동은 시정되어야 하며
여덟째, 밀수, 마약, 폭력, 부정식품, 강력범 등 각종 사회악은 말끔히 근절시켜 사회정화를 기하고
아홉째, 학원의 기업화와 과외과열 등 비뚤어진 교육풍토를 바로잡아 도의사회를 구현하는데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55)
라고 밝혀 이후 국보위의 정치일정을 예상할 수 있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
국보위는 이렇게 국정전반에 걸쳐 통제기능을 목표로 정책을 실행하면서, 신군부의 정권찬탈을 위한 밀실헌법 개정작업과 더불어 공무원사회의 숙정, 사회정화조치, 교육개혁, 사회악일소를 위한 특별 조치로서 삼청교육의 추진, 언론통폐합을 단행하였다.
(1) 반대정치세력 제거
신군부 세력은 5⋅17 전국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사회정화의 1차 작업으로 부패⋅비리정치인의 척결에 착수하여 김종필, 이후락, 이세호, 김진만, 김종락, 박종규, 이병희, 오원척, 장동운 등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합수본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8백53억여원의 재산을 환수당하였고, 8월 19일 전직장관, 여야중진 등 정치적 비리와 부패행위자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로 구자춘, 고재일, 김현옥, 구태회, 김용태, 길전식, 신형식,장영순, 현오봉, 정해영, 송원영, 고흥문, 김수한, 박영롱, 박해충,최형우, 김동영 등의 부정행위를 조사⋅발표하여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려 했다. 그리고 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한 내란혐의와 학원 및 노조소요의 조종혐의로 김대중과 그의 추종세력을 중앙정보부로 연행 조사하여 기소하였고, 김영삼은 정계은퇴선언과 함께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56)
(2) 공직자 숙정을 통한 관료부문 장악
국보위는 6월 4일 공직자 숙정에 착수하여 7월 31일까지 2개월에 걸쳐 추진한 공직자 숙정작업으로 입법부 11명, 사법부 61명, 행정부 5,418명 등 공직자 5,490명과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및 정부산하단체 등 127개 기관 임직원 3,111명 등 총 8,601명을 공직 또는 관련직으로부터 물러나게 하였다. 그 중 2급이상 고급공무원은 정원의 12.1%인 243명이며, 국영기업체 임원급은 전체의 23%에 해당하는 176명에 달하였다.57)
공직자 숙정 작업을 단행하여 신군부는 정치권 뿐만 아니라 관료 부문까지 장악하여 명실공히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3)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를 통한 사회분위기 쇄신
국보위는 국가의 안전보장과 사회안정을 저해하고 국민의 혐오와 원성의 대상인 고질적이고 만성적인 조직⋅상습폭력, 치기배, 기타 퇴폐적인 각종 사회악을 제거하고 정의로운 새 사회의 건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단행하였다. 폭력사범, 공갈, 사기사범, 사회풍토 문란사범, 밀수 및 마약사범, 상습 도박 행위자, 토색적 비리 행위자 등에 대해 군경 합동으로 일제 소탕에 나서 10월 10일까지 폭력배 40,570명, 공갈⋅사기배 1,550명, 상습도박⋅마약⋅밀수 등 사회풍토 문란사범 3,997명 등 총 46,117명을 검거하였다. 이들은 군⋅검⋅경 합동 심사위워노히의 심사를 거쳐 죄질이 나쁘고 무거운 2,243명은 전원 구속, 재판 계류했고, 나머지 29,892명은 군부대에서 순화교육을 받은 뒤 그 중 19,403명은 사회에 복귀하였고, 부족하다고 인정되는 6,351명은 계속 근로봉사중이며, 추가 검거되어 순화교육중인 자가 4,137명이었다.58)
이는 1980년 8월 4일 발표된 계엄포고령 13호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이 포고령에는 “불량배 일제 검거 -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태롭게 하고.... 불량배를 일제히 검거 순화”하기 위해서 대상자를 폭력사범, 공갈 및 사기사범, 사회풍토문란자로 규정한 것이다. 이 계엄포고령 13호에 의해, 1980년 8월부터 11월 27일까지 약 4개월에 걸쳐 검거된 불량배는 일정기준에 따라 분류 수용하여, 순화교욱을 실시하며,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할 수 있다고 하여 A급은 군재 회부, 또는 검찰에 송치하고, D급은 후견이 보증하에 훈방조치 하였으며, B급과 C급으로 분류된 28,919명은 이른바 ‘삼청 교육’이라는 4주간의 군부대 순화교육을 받게 하였다.59)
이후 국보위가 해체된 후에도 1981년 1월 24일까지 지속되어 60,755명이 영장없이 체포, 구금되었고, 이 중 A급 3,252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B⋅C급으로 분류된 39,742명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비인간적인 가혹행위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지⋅파출소 별로 폭력배와 불량배 등을 할당하여 검거토록 함으로써 지⋅파출소 직원의 사심에 의한 무고한 시민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빈번하였다.60)
(4)언론인 해직 및 언론통폐합을 통한 언론통제
국보위는 언론계의 정화작업이라는 명분으로 TV⋅라디오방송 등의 통⋅폐합과 개편을 단행했고 정기간행물 및 출판계의 정비도 단행하였는데, 언론의 국익우선 원칙과 사회적 책임성 재고를 내세워 7월 30일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가 ‘언론 자율정화와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케 하고 ,“부정부패, 국가관 결여, 무사안일”등의 명목으로 부정비위 언론인은 물론 자유실천 언론인 등 336명의 명단을 작성해 각 언론사에 통보해 이 가운데 298명을 해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해직된 사람은 933명이나 되었는데 무려 635명이 해직된 이유는 언론사들의 ‘끼워넣기’에 의해 해직된 것이다.61) 언론인 대량 해직은 국보위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준위 이상재가 보도검열단에 가담해 만든 ‘언론대책반’이 ‘언론계 자체 정화 계획서’를 작성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해직대상은 “언론계의 반체제 인사, 용공 또는 불순한 자,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동조한자, 편젭제작 및 검열주동 또는 동조자, 부조리 및 부정축재한 자, 특정정치인과 유착되어 국민을 오도한 자” 등이었다. 이 기준에 따라 보안사는 언론사에 출입중인 언론대책반 요원들을 통해 해직대상자를 선정한 것이다. 또한 등록 정기간행물 1천4백34개의 12%에 해당하는 1백72개의 등록을 취소하였는데 이 가운데엔 『기자협회보』, 『월간중앙』, 『창작과비평』, 『뿌리깊은 나무』, 『씨의 소리』등 당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정론성 잡지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62) 또, 전국 2천5백97개의 출판사 중 23.8%에 해당하는 6백17개의 등록을 취소시켰다.63)
이후 국보위 해체 후 80년 11월에 신군부는 언론통제의 연장선상에서 1도 1사 원칙으로 지방신문을 통폐합하고, 중앙일간지는 6개로 한정시켰으며, 통신을 통폐합하여 연합통신으로 단일화하고, 방송도 통폐합조치를 단행하여 동양방송(TBC)과 동아방송(DBC)을 KBS에 통폐합하고, MBC의 주식 65%를 KBS로 넘겨 정부 주도의 공영방송체제로 전환하는 언론통폐합조치를 단행하여 언론을 통제하였다.64)
1980년 11월에 단행된 언론사 강제 통폐합은 언론인 해직과 맥을 같이하는 신군부의 언론장악 정책의 하나였으며, 당시 언론사 통폐합은 언론사 사주들이 보안사 지하실에서 작성한 강제포기 각서가 13년만에 공개됨으로써 입증되었다. 또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1980년 12월 26일 통과된 언론 기본법은 언론의 공적 기능을 보장하기 위해 정보청구권과 취재원 보호조항, 정정 보도청구권65) 등을 도입, 긍정적 평가를 받을만한 측면도 있으나 언론자유보다 공적책임과 의무를 강조, 언론활동을 위축시키는 족쇄구실을 했다. 언론기본법이 악법임을 가장 잘 드러내는 조항이 문공부장관에 의한 정기간행물 등록취소 조항이었다.66)
또한 1980년 5월 18일 “5⋅17 전국비상계엄의 배경” 이라는 홍보간행물 5만부, 1980년 6월 1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왜 설치되었는가” 등의 홍보간행물 20만부 배포를 시작으로 1980년 10월 17일까지 총 22종 978만5천부의 홍보간행물을 전국에 배포하고, 9종의 홍보영화를 제작하여 전국 극장 및 기관에서 상영하여67) 신군부세력의 등장 배경의 당위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6) 교육개혁
1980년 7월 30일 국보위가 발표한 ‘7⋅30 교육개혁안’의 골자는 대학입시 본고사를 폐지하고 졸업정원제를 실시하는 ‘대학입시제도 개혁안’과 과외를 금지하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이었다.
국보위가 단행한 교육조치는 1) 본고사 폐지와 고교내신성적 반영을 통한 대학입시 개혁 2) 81학년도 신입생부터 졸업정원제 실시 3)81년 신입생부터 대학입학정원 최고 130%확대 4) 전일수업대학 운영 5)교육대학 4년제 개편 6)교육방송 실시 7) 방송통신대학 확충 8) 초⋅중등교육과정 축소 9) 재학생의 과외 및 대학생, 현직교사의 과외지도 금지등 과열과외 추방 등이었다.68)
7⋅30 교육조치 가운데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졸업정원제였는데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기업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고급인력을 양성하고, 대학정원보다 입학 정원을 늘림으로써 고등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했으며, 마지막으로 입학 후 경쟁을 통해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군부가 노린 목적은 졸업정원제를 통해 학점경쟁을 야기하여 대학생들의 정치적 저항을 무력화 시키고자 한 것이었다.69) 즉, 저항의 무력화와 더불어 체제 순응적인 인간을 길러냄으로써 자신들의 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을 차단하고자 하는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7) 경제계 통제와 민중부문에 대한 강제적 배제
국보위는 경제계 통제를 위하여, 재벌소유 비업무용 부동산 처분, 재벌그룹 소유 계열기업의 정리 , 회사정리제도의 보완 및 구제금융 억제, 외부감사제도 도입, 기업과세 제도의 합리화 등을 골자로 한 기업체질 강화정책, 중화학 공업 구조조정 및 노동조합 활동의 정화를 단행하였다.70)
국보위는 1980년 7월 16일 중앙국립극장에서 경제 4단체장을 비롯한 국내 유수 기업인 1,500명이 모인 이 대회에서 “기업윤리강령”을 채택케 하여 재벌을 비롯한 경제계에 이를 강요하였다. 이 “기업윤리강령”과 더불어 세부 실천요령까지 명기한 52개 항목의 “실천과제”를 선정하여 “기업윤리강령”을 기업인이 준수하여야 할 최고윤리규범으로, “실천과제”를 구체적으로 시행해야할 하위규범으로 규정지음으로써71) 기업인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가하였다. 물론 이러한 윤리강령과 실천과제가 법적인 강제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세부사항까지 명시하여 신군부의 재계에 대한 통제의지를 표명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재계의 순응을 강요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국보위는 노동계 정화에도 나서 노조를 통제하기 용이하도록 구조적으로 개편하였다.
1980년 7월 30일 현재 노동조합은 577개 지부에 1백11만 9천5백72명이었는데 국보위는 노동청을 통해 17개 특별검사반을 편상, 연인원 729명을 동원하여 1980년 6월 9일부터 7월 31일까지 한국노총과 17개 산별 노동조합 및 전국의 지역지부를 감사하여 비위가 현저한 노동조합위원장 12명을 사퇴케 하고 노총중앙위원회에서도 각급간부 191명을 자진사퇴시켰다.72)
또 노동조합의 구조적 개편으로 1)분규가 빈번했던 운송노조와 항만노조를 항운노조로 통합, 단일화 2) 사업장단위 노조를 지역별로 연합한 지역지부 107개소 각종 연합분회를 1980년 8월21자로 폐지 3)지역지부 산하 사업장단위 노조(분회)는 지부로 자동승격되도록하고 폐지 당시 분회장은 지부장으로 변경 신고조치 4) 지역지부의 재산은 1980년 8월21일자로 동결하고 청산위원회를 구성후 청산보고토록 조치 5) 단일기업 노조산하 분회는 독립된 지부로 개편 금지, 6) 지역지부가 관리운영하던 기숙사, 소비조합, 도서관 등 공동복지시설은 노조가 자율적으로 공동협의기구를 구성 운영, 7)노조운영 및 활동에 조합원이 아닌자 관여 금지 8) 상급단제 임원이 하급단체 임원을 임면하거나 대의원 선출 관여 등 금지 9)노조는 상근임원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노조임원의 겸직 금지, 결격사유를 규정하여 1980년 9월15일까지 결격사유자는 임원직 사퇴 10)조합비는 설립목적에 따라 최소한의 비용으로 절약하여 조합원의 권익을 위해서만 사용73) 등 각종 세부 규제사항을 마련하였다.74)
이러한 국보위의 조치로 1979년 110만명에 달했던 노조원 수는 1981년 82만2천명으로, 다시 1983년에는 78만5천명으로 감소하고, 1980년 407건이던 노사분규발생건수가 1981년도에는 186건, 1982년 88건, 1983년 98건으로 현저하게 낮아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75)
(6) 밀실 헌법 개정작업
국보위상임위원회는 18명의 현역군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전두환 대통령 취임 1개월 후인 10월에 제정된 제5공화국 헌법의 산파역할을 수행했다. 76)
1980년 6월 2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의 사표를 제출하고 6월 말경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에게 국보위 법사분과위원들을 동원하여 개헌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권정달 대령은 동 위원회에서 연구한 개헌안 시안을 7월 중순까지 완성한 후 곧 보안사령관실에서 동 시안을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보고하였다. 이 자리에는 노태우 수경사령관,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정도영 보안처장,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구국장, 허문도 중앙정보부 비서실장 등이 배석했다. 여기에서 대통령 선출방법, 대통령 임기, 국회의원 선거구제 등을 논의한 후 전두환 상임위원장은 간선제 대통령선출방법 등을 결정하였다. 이를 통해 8월 10일경 대통령 임기 7년(정부안 6년, 국회안 4년), 단임제와 간선제(국회안 직선제)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요강이 작성되었다. 77)
4.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성격
1980년 5월 31일에 발족된 국보위는 공직자 숙청, 언론인 해직, 언론통폐합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보위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각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켰다. 특히 국보위의 의장은 명목상 최규하 대통령 이었지만 이 국보위 전체회의는 불과 2회만 형식적으로 개최되었을 뿐 상임위원장과 상임위원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78)
상임위원회 아래 내각과 비슷한 13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여 주요 정책을 결정하였고, 앞에서 언급한 공무원 숙정⋅삼청교육⋅사회정화조치 등은 계엄업무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행정업무로 볼 수 있다. 또한, 전두환은 국보위상임위원장 취임 직후 헌법개정안 요강을 작성, 정권을 장악할 경우의 권력구조 등을 검토하여 자신의 집권을 제도화 하기위해 국보위를 활용하였다 . 결국 이 국보위는 대통령령에 의한 비상기구보다는 행정 각부를 통제하는 권력기구로 운영함으로써 전두환이 국정의 주도자임을 내외에 과시함으로써 전두환을 ‘최고지도자’격으로 격상시키는데 까지도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헌법기관인 행정각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키고 대통령과 국무회의의 권한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79)
Ⅳ. 국가보위입법회의
1.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대통령 취임
전두환은 5⋅17 이전까지는 단순히 군부세력을 장악한 군부실권자로 군림했지만 5⋅17 이후, 특히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임명된 이후에는 실질적으로 내각을 장악하여 최규하 대통령은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았다.
각부처 장관은 대통령을 제쳐놓고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우선 보고를 하는 등 국보위 출범이후 최규하 대통령은 사실상 직무수행을 포기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를 결심한 것은 7월 31일 설악산 하계휴가를 떠나기 전으로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청와대로 불러 하야결심을 밝히고 전두환에게 대통령 자리를 대신 맡아 줄 것을 당부하고 강릉으로 휴가를 떠났다.80)
이에 1980년 8월 18일 서울과 제주도를 필두로 잇달아 열린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에 대한 안보보고회의에서 새로운 대통령 후보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추대되었다.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보안사로부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하여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결의를 하여 달라”는 요구를 받고 8월 21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하여 보안사 권정달 대령이 전달해 준 훈시문 대로 “구국 일념으로 탁월한 영도력을 발휘하여 국가의 위기를 수습하고 새시대 새 역사의 지도자로 국내외에 뚜렷이 부각된 전두환 장군을 차기 국가원수로 추대하자”고 제의하여 만장일치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의하였다.81)
같은 날 최규하 대통령도 특별시국성명을 발표하여 “새 지도자는 사심이 없고 확고한 신념과 지도력을 겸비하여야 할 것이며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특수한 안보상황하에서는 국민의 전폭적 지지는 물론 국가보위의 주체인 군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다음 날(8월22일)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현역에서 예편하였고, 이로서 후임 보안사령관에는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이 임명되었다.82)
이렇게 현직 대통령이 재임해 있는 과정에서 신군부 세력은 먼저 전두환을 차기 대통령으로 추대해 놓고 이에 맞춰 현직대통령인 최규하가 하야성명을 발표하는 등, 신군부 세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전두환 단일후보를 총투표자 2525명 중 2524표의 찬성과 1명의 무효표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시켰고 9월 1일 잠실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전두환은 취임사에서 “정치활동은 새 헌법이 확정된 후 빠른 시일내에 재개토록 하되 참다운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정치풍토를 개선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선동, 비리, 파쟁, 권모, 사술, 부정부패 등의 정치작태에 책임있는 구정치인들을 이미 상당수 정리하였지만 앞으로도 구습에 물든 정치인에게 정치를 맡기지 않겠다고”고 하여 정계개편방침을 분명히 하였다.83)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정치일정은 10월 중에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81년 상반기 중에는 새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하여 새 정부를 출범 시킬 것과 계엄령은 정국이 안정되고 소요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해제할 것이라고 밝혔다.84)
이리하여 전두환은 9월 29일 제5공화국 헌법개정안을 공고하였고 그동안 유지해 오던 전국비상계엄을 다시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계엄령으로 변경한다.85)
2.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설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은 1980년 9월 9일 정부의 헌법개정심의위원회 제11차 전체회의를 통해 대통령 임기 7년, 단임제와 간선제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확정하였다. 1980년 9월 29일 전두환 대통령이 헌법개정안을 공고하고, 10월 22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투표율 95.9%와 찬성률 91.6%로 헌법개정안이 확정되었다. 1980년 10월 27일 개정 헌법이 공포되어 같은 날로 시행되었다. 86)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발효됨과 동시에 제10대 국회 해산 및 각 정당이 해산되었고, 국회를 대신하여 입법기능을 담당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발족시켰다. 이 입법회의는 국보위의 확대개편이자 위상 강화로 볼 수 있으며, 준군정기관이었던 국보위에 입법기능까지 부여하여 강력한 제도적 통제를 위한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설치근거는 10월 27일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의 부칙 6조 이다. 부칙 제6조는 다음과 같다.
제6조 제1항 :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이 헌법에 의한 국회의 최최의 집회일 전일까지 존속하며, 이 헌법 시행일로부터 이 헌법에 의한 국회의 최초의 집회일 전일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한다.”
제2항 :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각계의 대표자로 구성하되, 그 조직과 운영 기타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제3항 :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제정한 법률과 이에 따라 행하여진 판례 및 예산 기타 처분 등은 그 효력을 지속하며, 이 헌법 기타의 이유로 제소하거나 이의를 할 수 없다.”
제4항 :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정치풍토의 쇄신과 도의정치의 구현을 위하여 이 헌법시행일 이전의 정치적 또는 사회적 부패나 혼란에 현저한 책임이 있는 자에 대한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87)
그러나 1981년도 『연합연감』에 의하면, 국가보위입법회의는 1980년 10월 27일 하오 1시 45분 서울 삼청동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국보위 멤버들이 모임을 갖고 『국가보위입법회의법안』을 통과시켰다. 다시 말해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 중 개정령(대통령령 제10036호:1980년 9월 29일 공포)에 의해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제5공화국 헌법이 확정 공포된 10월 27일에 앞서 언급한 부칙6조에 의해 다시 한번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둔갑하여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통령의 자문기관에 불과했던 국가보위비상대책 위원회가 대통령령 개정에 의하여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바뀌고, 이것이 국가보위입법회의법 제정을 끝으로 헌법에 의한 국가보위입법회의로 인계된 것이다.88)
신군부는 자신들의 정치일정을 제도적으로 소화해내기 국가보위입법회의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 때문에 법절차를 무시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한 것이므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위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3. 국가보위입법회의의 구성
1980년 10월 27일 발효된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 전두환은 국회를 해산했고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그 기능을 대신하도록 했는데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은 모두 전두환이 임명했다.89)
이렇게 임명된 입법의원 81명의 출신을 분석하면 정계인사(정치인) 20명, 경제계3명, 학계13명, 법조계 8명, 종교계8명, 여성계 4명, 노동계 1명, 사회⋅문화계 9명, 언론계 3명, 재향군인 2명,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 10명 등이었다.90)
경력별 배경을 보면 교육자 21인(교수 18인 포함, 25.9%), 정치와 관료가 각각 12인(14.8%), 군인 11인(13.6%), 법조계와 언론계가 각각 7인(8.6%), 종교인 5인(6.3%) 등의 순으로 되어있으며 교수들의 등장이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써 교수들의 전문성을 활용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군인의 경우에는 5⋅17이후 등장한 세력이 눈에 띈다.91)
지역별로는 경북출신이 21명, 서울출신 14명, 전남출신 9명, 경남출신 5명 그 밖의 지역은 2~3명씩 안배하여 영남출신, 특히 경북출신 인사들의 대거 진출이 눈에 띈다.92)
입법회의 의원들은 그간 사회 각계에서 민주세력과 대치해왔던 인사들로서 자신들의 약화된 기반의 만회를 목적으로 참여하였다는 확증은 입법의원중 구 여야 인사 14명의 12대 국회의원 배출과 10여명의 입각, 그리고 상당수의 주요행정직 또는 외각단체장의 임명에서 드러난다. 아울러 입법회의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입법회의를 실질적으로 운영⋅주도한 운영위원회의 운영위원 10인중 7인이 군인이었고93) , 각 전문위원 역시 군출신이었으며 전문위원들은 대부분 국보위에서 새로이 등장한 세력들이었다.
4. 국가보위입법회의의 활동
1980년 10월 27일 발효된 헌법에 의해 국회 및 정당 해산으로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정치풍토 쇄신법, 언론 기본법의 제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국가보안법, 노동 관계법 등의 개정을 통하여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사전에 봉쇄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화 요구를 차단시키는 한편, 컬러 TV방영, 프로스포츠의 개막, ‘국풍’행사등을 통하여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희석시키고 분산시키고자 하였다.94)
또 위의 법령 이외에 정당법, 정치자금법, 선거관리위원회법, 대통령선거법, 국회의원 선거법, 국회법, 사회보호법, 등 활동한 166일동안 국회의 권한을 대행해 제출된 189건의 법률안중 189건 모두가 가결되었다.
(1)언론기본법
언론기본법은 1980년 12월 24일 문교공보위원장 송지영으로부터 제출되어 12월 26일 제13차 본회의에서 원안대로 처리되어 12월 31일에 법률 제3347호로 공포되었다.95)
그 주요 골자를 살펴보면 언론의 정부 단체에 대한 정보청구권을 사법적으로 인정하고, 취재원에 대한 진술을 거부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등96) 일면 긍정적인 면도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 언론기본법은 입안과정이나 심의과정에서 언론인들을 상대로 한 공청회도 거치지 않아 제정절차에 있어서도 민주성을 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보위에서 단행한 언론 통폐합 및 기자 해임, 정기간행물 및 출판사의 등록취소등을 법적으로 마무리 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송지영, 남재희, 정범석, 정태수 등 언론법 기초 4인 소위가 마련한 언론기본법의 실제 가결된 독소조항으로는 언론의 공적 책임강조(3조)97), 언론의 주의 의무(9조)98)등 언론의 의무에 관한 조항뿐 아니라 정간물을 발행할 수 있되 문공부에 등록해야하며(20조)99), 행정부는 취소, 1년이하 발행정지할 수 있다(24조) 및 정간물과 방송의 표현물을 법관의 영장으로 압수할 수 있다(7조1항)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100)
(2) 노동관계법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개정된 노동관계법은 주로 민주노조운동을 봉쇄하기 위한 각종 장치를 마련하고 사용자측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낼 만큼 반노동자적, 반노동조합적 이었다. 이 개정법의 내용은 유신헌법시대보다 오히려 퇴보하여 개악적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 예로 1980년 12월 30일 의결된 근로기준법에서는 1일8시간의 노동시간의 경직성을 완화하기 위하여 당사자의 합의가 있는 때에는 주 48시간 단위로, 1일 7시간의 연소근로자의 노동시간도 합의에 의해 8시간까지 가능하게 하였다.101)
또 노동조합법에서는 조합비의 상한설정, 제3자 개입금지, 기업별 조직형태의 강제, 단위노조의 설립요건 강화, 노조임원의 결격사유 및 임기제한, 노조 전임임원의 겸임금자, 단체교섭권의 제3자 위임금지, 행정관청의 단체협약 취소⋅변경명령,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연장(3년),등 자주적 단결권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였다.102)
(3)정치풍토쇄신을위한특별조치법
이 법안은 1980년 10월 29일 이광로외 7인의 발의로 제출되어 1980년 11월 3일 제3차 본회의에서 수정가결 되었다.
이 법안은 1968년 8월 16일부터103) 1980년 10월 26일까지의 기간중 정치적 또는 사회적 부패나 혼란에 현저한 책임이 있는 자를 1988년 6월 30일까지 규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데104) 이 법에 따라 1980년 11월 7일 “정치풍토쇄신 9인위원회”가 구성되어 김중서 대법원 판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정치활동규제대상자 811명을 발표하였다.105)
정치활동 규제는
1. 공직선거에 있어서 후보자가 되는 일
2. 공직선거에 있어서 특정후보자를 지지 또는 반대하는 행위를 하는 일
3. 정당 또는 정치적 사회단체에 가입하거나 그 고문 기타 이에 준하는 직위 또는 그 결성의 발기나 준비를 위한 직위에 취임하는 일
4. 정치적 집회의 주최자 또는 연사가 되는 일
5. 전 각호 이외에 특정한 정당, 정치적 사회단체 또는 타인의 정치활동을 원조하거나 방해하는 일을 의미했다.106)
(4)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이 법안은 1980년 11월 25일 정부로부터 제출되어 11월 29일 원안대로 가결되어 1980년 12월 28일 법률 제3278호로 개정되었는데107)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시위의 개념을 “다수인이 공동목적을 가지고 도로 기타 옥외장소를 진행하거나 무력 또는 기세를 보여 불특정다수인의 의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압을 가하는 행위”108)로 그 의미를 확장하였고,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에 관한 단속법규에 위반하거나 위반할 우려가 있는 집회 또는 시외와 그 밖에도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 또는 시위를 금지대상에 포함시켰으며109), 집회나 시위의 주최자 또는 장소관리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경찰관의 지시에 위반하거나 출입을 거절하여서는 아니 되도록 규정함110)으로써 경찰관이 지시 또는 출입할 수 있는 장소를 종래의 옥외집회 또는 시위현장에서 모든 집회나 시위장소로 확대하는 것 등이었다.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은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와 같이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포괄규정 등으로 법집행자의 자의에 따라서 얼마든지 집권자의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정치활동과 표현의 자유를 탄압할 수 있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111)
(5)국가보안법개정법률안
이 법안은 1980년 12월 29일 법제사법위원장(정희택)으로부터 제출되어 1980년 12월 30일 원안대로 의결되어 12월 31일 법률 제3318호로 개정되었는데 대부분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하여 사법경찰관 단계에서 1차, 검사단계에서 2차의 구속기간 연장을 할 수 있게 바뀌었다.112)
이 구속기간의 연장은 곧 특수기관에 의한 피의자의 인권 침해, 고문을 통한 사건조작을 용이하도록 만들었고, 그 때문에 다수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들이 고문과 용공조작의 시비 속에 놓이게 되었다.113)
또 반공법을 폐지하고 국가보안법에 통합규정하면서 양 법률상의 유사규정 내용114)을 통합하였고 반국가단체구성 및 가입죄, 목적수행죄, 잠입⋅탈출죄, 이적단체구성가입죄, 회합통신죄의 형량을 상향조정하는 등 상향조정하였다. 또 반국가단체 및 이적단체의 구성원 등의 목적수행을 위한 허위사실 날조⋅유포죄를 신설하고 국가보안법사범체포유공자의 원호대상을 신고도중 및 신고나 체포에 관련하여 부상당한 자나 사망자의 유족까지 확대하는 등 이전의 국가보안법의 규정보다 훨씬 강화하였다.115)
5.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성격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제11대 국회가 개회하기 하루전 4월 10일 폐회식을 거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호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은 “입법회의는 질서있고 효율적인 운영을 수범함으로써 새시대의 국회상과 국회운영상의 질서를 새로이 제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국가보위입법회의 본회의의 법률안 처리 과정에서 반대토론이 한번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민을 위한 대표로 구성되지 않고 전두환 자신이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기반으로서 군사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만의 ‘효율성’과 ‘신속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116)
또 이른바 비상국회라 할 수 있는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전원을 대통령 전두환이 임명하였다는 것은 그 자격에서 원초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민의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입법기관의 의원들이 법안, 예산안 등을 얼마나 국민의 입장에서 통과시켰을 것인가는 미루어 짐작할 만 하다.
즉,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국민의 대표로 구성되지 않은 입법기관으로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신군부의 집권을 정당화 하고 국보위에서 행한 일련의 조치들을 사후적으로 제도화, 법제화 시킴으로써 면죄부를 주려한 것으로 임시적이며, 위헌적이며 불합리한 통치행위로서의 입법기관으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